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Daehan Empire History Museum)
참고 : 덕수궁에 있는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을 관람하려면 사전에 예약을 해야만 입장할 수 있다.
▷ 1층은 생활사 재현공간으로는 중앙홀, 귀빈대기실, 접견실, 소식당, 대식당.
대한제국 전시공간으로는 대한제국 정치, 외교, 의례로 전시되어 있음
▷ 2층은 생활사 재현 공간으로는 황제 침실, 황제 서실, 황후 침실,
대한제국 전시공간으로는 황실 인물사로 전시되어 있음.
▷ 지층은 대한제국 전시 공간으로 근대적 개혁, 신문물, 석조전 복원기가 전시되어 있으며
입장은 자유로이 할 수 있다.
석조전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은 대한제국기 황궁의 정전인 석조전을 원형 복원한
건축물이며, 대한제국의 생활사와 근대의 정치, 외교, 의례, 황실사를 담은 전시 공간이다.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은 자주 근대국가를 염원했던 우리의 역사가 담겨 있다.
대한제국의 선포
고종은 1895년 경복궁에서 일본인에 의해 명성황후를 잃는 을미사변을 겪은 후,
위협으로 둘러싸인 경복궁을 나와 1896년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이듬해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들어가 조선의 자주 독립을 위해 새로운 체제를
갖추고자 황제국을 선포하였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에서 황제로 등극하였다.
새 국호는 고대의 삼한을 통합한다는 의미에서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광무(光武)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 황룡포를 입은 고종(광무황제)
▲ 석조전 중앙홀
정면에는 접견실 측면에는 귀빈대기실과 대 식당이 연결되어 있다.
▲ 접견실
대한제국의 외교
1876년 조선은 일본과 조일수호조규를 맺은 이후 미국, 영국, 독일 등 서양 각국과도
조약 을 체결하여 자주국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자 했다.
국내에 파견된 외교사절 및 외교관들은 정동주변에 공사관을 마련하였기에 정동은 외교의 중심이 되었다.
국외에 파견된 대한제국 외교관으로는 대표적으로 민영환, 이범진, 이한응이 있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했을 때와 1910년
국권이 피탈되었을 때 이들은 모두 자결하였다.
▲ 관련사진 :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사진출처:전자신문)
▲ 대식당
공식적인 행사 후 만찬을 베푸는 장소로 사용
▲ 대한제국 황실 가계
▲ 석조전 중앙홀에서 촬영한 대한제국 황실가족사진(1918년)
▲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설명을 경청하고 있는 관람객들
▲ 계단의 문양
▲ 황제침실
▲ 황제 서재
황제가 책을 보거나 가까운 손님을 맞이하는 서재
▲ 황후거실
▲ 황후침실
▲ 테라스
▲ 영친왕
영친왕은 고종과 순현황후비의 아들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이다.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태어났으나 유햑을 빌미로 강제로 일본으로 이주당하여
대부분의 생애를 일본에서 보냈다.
영친왕은 1920년 일본 왕족의 딸 마사코와 혼례를 올렸다.
광복 이후에도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 머물다가 1962년 국적을 되찾고 이듬해인 1963년
부인과 함께 귀국하여 여생을 한국에서 보냈다.
▲ 결혼예복을 입은 영친왕과 영친왕비(1920년)
대한제국의 신문물
지층전시관은 개항 이후부터 대한제국기까지 국내에 도입된
전기, 교육, 통신, 의료, 우편 등 근대기의 다양한 변화를 볼 수 있는 전시공간이다.
대한제국 선포를 전후하여 정치·외교·경제·사회·문화 등 전면에서 근대화를 위한 일련의 노력이
있었다. 일본·미국·유럽을 통해 전기·철도·우편 등의 신기술과 문화가 유입되었고
이를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말았으나 대한제국기의 이러한 경험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적 자긍심을 유지하고 광복 이후 대한민국이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 내용 글 : 석조전 관람안내 소책자를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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